입력 2025.12.09 17:55
중앙사보는 창간 6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 최고참 기자 2명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주인공은 유상철 중국연구소 소장(25기)과 고대훈 기획취재국장(26기). 두 사람은 각각 1988년 6월과 11월 입사자로, 중앙일보 소속 현직자 중 80년대 입사자는 25기인 최훈 고문, 고현곤 편집인까지 총 4명 남아있다. 인터뷰도 잊은 채 이야기에 빠져있던 사보기자에게 두 베테랑은 “아니, 왜 그건 안 물어봐?”하며 여러 무용담을 풀어냈다.
휴대전화도, 노트북도 없던 1980~1990년대 공중전화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여느 기자처럼 사회부에서 경력을 시작한 고대훈 국장은 “그때는 길거리에서 공중 전화를 먼저 확보하는 게 정말 중요했다”며 “메모를 보면서 기사를 부르면 안에서 받아 적으면서 고쳤다”고 말했다. 이어 “1면 톱과 3면 박스 기사를 한꺼번에 쓰게 되면 200자 원고지 15~20장 정도 되는데, 그럼 10분도 더 걸렸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15일 연속 1면을 장식한 적도 있다고.
기사를 전화기 너머로 듣고 정리하는 ‘캐처(catcher)’를 했었다는 유 소장은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이런 지명 등을 전부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했다. 선배가 기사를 불러줬는데, ‘목동’을 한자로 몰라서 버벅대면 바로 야단맞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탱크 모양’이라며 설(卨)자를 설명하던 장면은 1995년 10월 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제호 및 본문을 모두 한글화하기 전까지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컴퓨터가 처음 취재 현장에 적용되던 시기도 이때다. 1992년 1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최종예선을 취재했던 유상철 소장은 “그 때가 286 노트북을 들고 가 해외에서 기사를 전송했던 첫 케이스”라고 소개했다. 당시 국제전화비가 많이 나올까 봐 호텔 측과 전송 시작 시간과 끝 시간을 두고 약간의 실랑이도 벌였다고. 유 소장은 당시 사보에 “팩스로 전송했다면 200자 원고지 3장 분량에 약 16달러를 내야 하지만, 워드로 전송하면 40초만 걸려 4.9달러로 족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해 위험도 더 무릅써야 했다. 1996년 파리특파원으로 르완다 내전 취재 현장에 간 고 국장은 “현장에서 사진을 보낼 수 없어 (인근 지역인) 케냐까지 유엔기를 타고 날아가 사진을 전송했다. 거기에 가서야 회사에 내가 여기 있다고 전화로 알릴 수 있었다”며 “신문기자는 항상 혼자다. 현지에서 공무원 섭외 등 로비 자금과 취재 비용으로 쓸 현금 1만 달러를 품고 택시를 타는데 시내에 불빛이 하나도 없더라. 정말 무서웠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일보’는 어떤 이미지였을까. “가장 모던하고 시크한 곳이었다”고 대답한 고 국장은 “중앙일보는 호암아트홀 이미지도 강해서 굉장히 쿨했다. 취재원들도 우릴 평가할 때 가장 젠틀하다고 그랬다. 타사하고 우리는 문화가 달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도 이런 세련되고 쿨한 이미지는 계속 가져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외부 사람들이 느끼는 중앙일보 기자에 대한 인상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들만의 ‘장수 비결’도 물었다. 유 소장은 “정년(퇴임) 뒤 다시 회사를 오게 되니, 어떤 부담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뭐도움 될 건 없을까 그런 생각만 있다. 이게 오히려 오래 가게 된 비결 같다”고 말했다. 고 국장은 “고비마다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수 비결의) 첫째는 내 자발적인 의지일 거고, 둘째로는 매 순간 날 도와주는 인연이 있었던 게 큰 복”이라며 “조금 힘든 일도 있었지만, 기자라는 일과 나와 같이 일하는 기자님들 덕에 재밌었다” 고 37년을 돌아봤다.
몇 달 뒤 들어올 새내기 후배들에게도 한마디 청했 다. 유상철 소장은 본인의 기자 생활에 대해 ‘노심초사 전전긍긍’ 이라고 요약하면서도,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가 돼라”고 조언했다. 본인 역시 잘하고 싶은 마음에 ‘전전긍긍’했지만, 후배들도 이런 ‘욕심’을 가지고 취재해 주길 바란다는 것. 고대훈 국장은 “기자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종종 들었다. 부당한 것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의 고고한 맛이 생활과 기사 속에서 묻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었다”면서 “언론의 ‘감시견’ 역할을 잘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